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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독일 국경에서 한국과 일본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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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바라기 작성일14-01-20 10:29 조회5,4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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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독일 국경에서 한국과 일본을 생각한다
 
 
▲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젊은이들의 유럽 모임’의 저녁 기도 시간 (사진 제공 / Wiesia Klemens)
 
 
성탄절부터 1월 초까지 알자스 지방의 스트라스부르에서 지냈다.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독일에 접한 이 도시에는 유럽 의회를 비롯한 여러 유럽 기관이 있다. 여기서 우리 공동체가 주관하는 ‘젊은이들의 유럽 모임’이 열렸다. 떼제의 유럽 모임은 1978년에 시작했으니 이번이 36번째다. 그 사이 유럽은 아주 많이 변했다.
 
올해는 개최지 인원을 포함해서 약 3만 명이 참가했다. 아일랜드에서 러시아, 노르웨이에서 몰타에 이르기까지 동서남북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개신교, 정교회, 가톨릭 청년들이 모였다. 유럽 모임이라고 부르지만 소수의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미의 젊은이들도 함께한다.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이나 한국, 일본, 홍콩 등지에서 일부러 오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4박5일 동안 스트라스부르 시와 인근 지역의 가정에 묵으면서 매일 함께 만나 기도하고 신앙과 사회 문제에 관해 토론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지역’이 프랑스의 알자스 지방뿐 아니라 인접한 독일의 오르테나우 지방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전체 순례자의 4분의 1 가량이 독일 가정에서 묵었다. 유럽 의회 옆에 있는 대형 전시장과 농구 경기장 등에서 저녁 기도를 마치면, 버스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여러 도시와 마을로 참가자들을 실어 날랐다.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매일 두 나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이들의 할아버지 혹은 증조할아버지 세대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사실 이전 세대에 많은 청년들이 함께 국경을 넘은 적이 있기는 했다. 그때는 무기를 손에 든 채로였지만, 유럽의 변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프랑스와 독일 양국에는 평화의 미래를 준비하는 정치인들이 있었다. 1950년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새로운 전쟁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서 석탄과 철강의 단일시장을 제안했다. 다시는 “전쟁을 생각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3국을 포함, 여섯 나라가 파리 조약(1951)에 서명함으로써 유럽에서 처음으로 초국가적인 공동체가 탄생했다. 이것이 유럽공동시장, 유럽공동체 그리고 지금의 유럽연합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긴 세월 동안 원수로 지냈던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통합의 동력이 된 것이다. 그 뒤에는 평화와 화해를 위해 애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1963년 드골 대통령과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독일 우호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두 나라는 화해에 큰 걸음을 내디뎠다. 양국은 “중요한 모든 사안”에 대해 협의하여 최대한 같은 입장을 갖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독-불 조약의 직접적인 결실로 독-불 청소년 교류회가 발족하고 양국의 수많은 학교와 도시, 지역과 대학이 자매 결연을 맺었다.
 
조약 체결 40주년을 맞은 2003년, 이 협력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고, 한 걸음 나아가 공동의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두 나라의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했다. 20세기에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두 번이나 전쟁을 치른 프랑스와 독일의 학자들이 함께 역사 교과서를 집필한 것이다. 그 사이 세 권의 역사책이 불어판과 독어판으로 나와 두 나라의 고등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다. 노인 세대에게는 놀라운 일이지만, 젊은이들은 이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 용서와 화해는 나라 사이에서도 필요하고 가능하다는 것을 프랑스와 독일은 보여주었다.
 
  
▲ 한 가족이 ‘젊은이들의 유럽 모임’ 참가자들을 집으로 맞아들이고 있다. (사진 제공 / Wiesia Klemens)
 
 
이번 유럽 모임 마지막 날, 프랑스의 한 신자 가정을 방문했다. 가장인 이봉은 알자스 토박이다. 25년 전 철의 장벽이 무너지던 시기에 떼제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폴란드에 처음 갔고, 나중에 폴란드 여성 카시아과 결혼했다. 그는 매일 회사가 있는 독일 바덴바덴으로 출퇴근한다.
 
그의 아버지는 2차 대전 때 독일 군대에 징집되었다. 당시 알자스는 독일 땅이었다. 이봉은 자라면서 독일 말에 가까운 알자스 말을 썼는데 이제 그 말을 쓰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그의 맏아들 가에탕은 불어와 독어, 두 언어를 쓰는 학교에 다닌다. 거기서 수학과 자연 과목 등은 독일말로 배운단다. 이봉 가족은 이번 모임 동안 포르투갈과 폴란드 남녀 청년 다섯 명을 맞이했다. 이봉의 네 살짜리 아들은 처음 방문하는 나를 보고 신이 나서 자기 집에서 잘 거냐고 연신 물었다. 이 어린아이는 낯선 외국인을 보고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재워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흘 동안 지내고 돌아오면서 한국과 일본을 생각했다. 정확히 30년 전 이맘때, 나는 일본에서 한 달 남짓 지냈고 일본인들과 함께 인도와 방글라데시를 여행했다. 서울 영등포에서 나서 자란 일본 신부님 한 분이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를 초대해 주셨다. 그 신부님은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위해 일본 젊은이들을 데리고 몇 차례 한국을 찾아와 서울 난지도와 목포 등에서 순례를 하셨다.
 
그때 나는 일본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한국과 한일관계의 과거사에 무지한 것을 보고 놀랐다. 한국에서 나는 줄곧 “(일본에 당한) 과거를 잊지 말라”고 배웠는데, 일본은 학생들에게 마치 “얼른 잊어버려라” 하고 가르친 듯한 느낌이었다. 두 달 동안 일본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일본 사람을 보면 먼저 말을 걸고 가능하면 도움을 주겠다”고 마음먹었고 실천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그 사이 한국 경제는 급속히 발전했고 젊은 세대에서는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열도에는 <겨울연가>의 욘사마를 필두로 대중문화의 한류가 흘렀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위안부 할머니, 역사 교과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무게가 짓누른다. 언제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 화해와 용서가 가능해질까? 과거는 어떻게 청산되고 극복될 수 있을까? 지금 두 나라의 정부를 보면 오히려 뒷걸음치는 것 같아 안타깝고 화가 난다. 한심한 정치인들만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 바른 역사관과 미래의 비전을 가진 학자와 언론인, 시민들의 노력이 필요하겠다.
 
전후 독일의 참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흔히들 얘기한다. 용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참회가 가능하다는 말도 한다. 그리고 “일본은 독일과 전혀 다르다”는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소수라 해도, 두 나라가 프랑스와 독일처럼 새로운 역사를 써 가는 것이 불가능하리란 법은 없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까? 어떻게 용서와 화해의 누룩이 되어 평화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까?
 
스트라스부르에서 나라별 모임을 할 때 한국과 일본 젊은이들이 함께 만났다. 지난 10월초 대전에서 열렸던 떼제의 동아시아 모임에 참석했던 일본의 기미꼬는, 거기서 따뜻하게 환대받은 얘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최근 두 나라 사이의 외교 갈등 때문에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한국에 갔는데, 만나보니 모든 우려가 눈 녹듯 사라지고 한국 친구들과 아주 깊은 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 두 나라의 젊은이들은 이미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가 진정 우리의 “이웃사촌”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이 더 자주 만나고 어울려야 한다. 정치인들을 보면 암담한 지금, 교회가 그런 기회를 만들고 이해의 다리를 놓으면 좋겠다. 일본말을 유창하게 하는 한국 사람이나 한국말을 잘 하는 일본 사람이 적어도 괜찮다. 국제 모임에서 콩글리시와 일본식 영어를 제일 잘 이해하는 외국인도 다름 아닌 일본과 한국 사람들이다.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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