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수도회 CONGREGATIO JESU

Ad Majorem Dei Gloriam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 홈
  • Bulletin board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웰랑 뜨레이

페이지 정보

작성자 주바라기 작성일12-10-08 13:25 조회5,450회 댓글0건

본문

"여러 신들, 그리고 숲의 신이시여, 지금은 송아지가 한 마리밖에 없는데 어미 소가 새끼를 백 마리 낳게 해주세요.”
뜨레이와 슬리는 한 손으로는 어미소를 묶었던 끈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흔들리는 촛불이 꺼질세라 조심스레 바람을 막는다. 입은 변변찮은 제사 음식을 송구스러워하면서도 소원을 비느라 바쁘다. 소원은 소박하고 절박하다. 이들의 종교에서 구원은 ‘소박한 넉넉함’이다.
 
   
▲ 영화 <웰랑 뜨레이> 2012
10월 7, 9, 12일에 ‘부산 국제 영화제’ 기록 영화 부문인 ‘와이드 앵글’ 에서 경쟁작으로 상영될 영화 <웰랑 뜨레이>의 도입부이다. 김태일, 주로미 감독 부부는 두 아이들과 함께 2011년 9월 말부터 여덟 달 동안 캄보디아 동쪽 고산지대인 몬돌끼리의 부농족 마을 ‘부땅’에 들어가 살았다. 뜨레이 씨 가족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삶을 영상으로 담아냈다. 감독 부부가 내게 영상의 한국말 번역을 부탁했을 때 나는 한국인, 크마애, 부농족 모두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거절하지 못했다.

번역을 다 마칠 때쯤, 친구 목사와 함께 뜨레이 씨 가족을 만나러 몬돌끼리로 갔다. 몬돌끼리로 가는 길은 멀었다. 졸다 깨면 창밖으로는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부터 수지 채취를 위해 숲을 베어내고 심기 시작한 고무나무들이 얕고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다시 눈을 뜨면 불을 질러서 거뭇거뭇 숱이 빠져버린 숲이 보인다.
“(외국인들을) 처음 두세 번 만났을 때는 저도 겁났어요. (친정 엄마는) 크마애(캄보디아 사람)이건, 외국인이건, 그냥 걸어오기만 해도 겁이 나신데요. 그래서 문을 꼭꼭 쳐닫으시고.”
 
슬리와 친정 어머니가 외부인을 향해 갖는 두려움은 역사가 길다. 프랑스 식민통치 때는 프랑스인들 앞에서, 베트남 전쟁 때는 양 쪽 군인들 앞에서, 지금은 외국인 선교사 앞에서 그렇게 두려웠다. 비단 1세계의 외국인들 뿐 아니라 우리가 원조해주고 구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3세계 국민인 크마애 앞에서 조차 줄곧 그래 왔다. 역사의 주체들이 끊임없이 이 부농족들을 소수자로, 약자로, 덜 개화된 자들로 바라봐 왔기 때문이다.
“무서웠던 게, 이분들(김태일 , 주로미 감독 가족)이 여기 계속 오셨는데 왜 그랬는지 몰랐거든. 예수교 믿는 사람들인 줄 알고 무서웠어.” …“굉장히 겁났어. 우리 가족이랑 아버지네는 계속 제사를 지내거든.”
적어도 한국 가톨릭 안에서는 조상제사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가톨릭이 조선 땅에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조상제사는 북경에 있던 주교들에 의해 야만의 풍속으로 여겨졌고 교회의 이름으로 금지되었다. 한편 조정에서는 서양 종교에 홀려 인륜의 근본인 효와 조상을 모시는 일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천주교인들을 박해했다. 그때 유교 문화에 젖어 살던 조선의 천주교인들처럼, 숲의 신들과 조상신에 기대어 풍요를 빌며 사는 슬리도 ‘예수가 누구인가’보다는 몸에 밴 문화로서의 ‘조상제사’의 여부가 두려움의 근원이다.
“겁나지. 똑같이 죽으니까. 예수교를 믿어도 죽고, 우리처럼 이렇게 살아도 죽고.”
슬리의 친정 아버지는 어떤 종교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신다. 이 분에게 부활, 영생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설명해드리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으실까?
 
   
 
▲ 뜨레이 씨의 부인인 슬리 씨가 아이와 함께 누워있다. ⓒ 김태진
 
 
뜨레이 씨네 집에 도착해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니, 창밖으로 먹구름이 시커멓다. 뜨레이는 우리보고 처가에서 함께 자자고 하지만, 처가에는 적지 않은 식구들에 스레이넨을 낳으며 피를 많이 흘려 힘들어 하는 슬리 씨가 누워 있다. 대신 뜨레이 씨네 농막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어두운 숲에 내리는 비는 보이지 않고 들리기만 한다. 비는 나뭇잎을 씻어내고 양철지붕을 때린다. 농막 안에 모닥불을 피우지만 눅눅해진 나무들은 연기만 낼 뿐 불이 붙지 않는다. 바람이 없어 농막 안에 꽉 찬 연기는 어둠속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옷으로 스며든다. 눈이 맵다.
프놈펜으로 내려오는 길은 멀지 않았다. 뜨레이 쎄네 농막에서 내려다보았던 숲 속의 화전, 스레이넷을 안고 누워있던 슬리를 떠올리는 사이에 버스는 벌써 프놈펜이다. 옷에선 아직도 농막의 연기 냄새가 난다. 연기 냄새 말고 내 몸에는 또 다른 무엇들이 배어 냄새를 피우는가? 나는 한국인으로서 가톨릭 선교사로서 부농족 사람들로부터 일종의 표상을 본다. 기존의 인식의 틀을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하여 분석, 비판, 단죄한다. 제3세계, 가난한 나라, 선교의 대상이 된 나라들에게 역사적으로 강요된 표상들은 가난, 무지, 질병, 정부의 부정부패, 내전 등으로 분류된다.
나는 그런 인식의 틀을 지워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을 만나고 더불어 살고 싶어 여기 오지 않았나? 하지만 깨어 자유로워지고 싶은 개인의 의지와 성찰은, 거대 담론 앞에서 역부족이다. 표상들은 ‘나는 이들보다 잘 사는 나라에서 왔고 많이 배웠고 앞선 문명을 몸에 익히고 있다’는 우열의 이분법적 타자화를 조장한다. 우열의식은 관계 안에서 상대적인 권력으로 작용한다. 그 권력은 신앙을 통해, 예수회 양성을 통해 자리잡은 ‘사랑’, ‘자비’라는 나의 그리스도교적 가치 속으로 깊숙이 배어 들어간다. 도저히 따로 분리해 낼 수 없다. 더구나 1세계에 자욱하게 낀 신자유주의의 연기는 이보다 더 진하게 배어있다.
 
   
 
▲ 영화 <웰랑 뜨레이>(Wellang Trei, 2012) 중에서,
 
 
   
 
▲ 영화 <웰랑 뜨레이>(Wellang Trei, 2012) 중에서,
 
 
사실 뜨레이 씨네 가족의 삶에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는 가치는 그들이 피부로 느끼는 이방인, 예수교, 조상제사 등이 아니다. 지금 전 세계를 물들이는 신자유주의 담론이다. 풍년을 바라는 제사를 지내도 벼농사는 그리 수확이 좋지 않고, 더운데 김매고 땅에서 캐내 껍질 벗겨서 카사바를 팔려고 내 놓으면 거대 자본의 중간 상인들이 값을 조정한다. 집 지으라는 어른들 말씀 따라 나무 잘라 켜서 집을 지으려 하면 불법 벌목이라 유치장에 갇히고 벌금을 내야 풀려 나온다. 전통의 삶의 방식을 지키며 살고 싶어 하지만 이미 몬돌끼리 ‘뚜땅’까지 오토바이, 핸드폰, 텔레비전, 그리고 방문객들을 통해 새로운 문물, 삶의 방식이 들어와 유혹하고 있다. 그런 삶은 돈을 요구하고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발을 들여놓으라 한다.
서로 다른 둘의 만남은 항상 정직하다. 만나면 가지고 있는 그 만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보든 못 보든. 선교사로서 진정한 선교는 물질적인 원조도, 성서 구절이나 전례도 아니고, 예수의 복음적 가치의 전파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내 몸에 밴 태생적 한국 문화, 신앙과 양성을 통한 복음적 가치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거대 담론 안에서 그것의 침식과 폐해를 성찰하고 벗어나려 노력한 그 만큼의 신자유주의도 함께 전해진다.
슬리는 스레이넨을 안고 누워 나를 바라본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스레이넨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더 힘들다. 갖 태어난 스레이넨이 내 몸에 밴 여러 가치들을 또렷하게 그러나 낯설게 보기 때문일까?
버스가 프놈펜 시내에 들어서니 삼사십층 빌딩이 우뚝 서 있고, 그 빌딩의 1층 상점들에는 서구의 유명상표 간판이 즐비하다. 혼다, 스즈끼 오토바이가 물결치고 렉서스가 위엄 있게 차도를 군림한다. 나는 어느새 다시 신자유주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영화와, 몬돌끼리 여행에 대한 내 성찰의 단편들을 들었던 친구 목사는 버스에서 내리려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한마디 한다.
“신부님, 우리가 100년 전의 선교사들을 제국주의 담론의 첨병으로 평가하듯, 우리도 백 년쯤 뒤엔 신자유주의 담론의 첨병으로 평가 받을 수밖에 없어요.”
영화 <웰랑 뜨레이>는 캄보디아 산악지역 소수민족의 이야기 뿐 아니라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태진 신부 (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