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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죽음을 무릅쓴 예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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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바라기 작성일14-04-08 10:03 조회1,9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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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석 신부] 죽음을 무릅쓴 예수님의 사랑
4월 6일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요한 복음서는 기원후 100년경에 기록된 초기 신앙인들의 명상록입니다. 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은 그때 이미 기록되어 있던 다른 복음서들에서 주제들을 택하여 명상하는 식으로 엮었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들은 요한 복음서 9장은 예수님이 어느 시각장애인의 시력을 회복해 준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자 예수님에게 “주님,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보고, 새롭게 믿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을 목자라고 말합니다.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착한 목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바로 그 다음 장인 11장입니다. 착한 목자가 자기 양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듯이, 예수님은 라자로를 살리고,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는 과정을 상세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유대 최고회의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요한 복음서 11장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고 그 사실 때문에 당신은 목숨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라자로를 살린 오늘의 이야기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예수님의 위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약 70년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그분의 죽음을 명상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분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 계시는지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 역사에 흔하디흔한, 무죄한 자의 억울한 죽음의 하나였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분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기 전에 ‘비통한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그분이 라자로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결국 오늘의 복음이 명상의 자료로 제공하는 것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리시듯이, 예수님도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셨고,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무릅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라자로를 살린 오늘의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를 살린 이야기들은 다른 복음서들 안에도 있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어린 딸을 살린 이야기가 마르코, 마태오, 루카 복음서 안에 있고,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린 이야기가 루카 복음서에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자료로 삼아 라자로를 살린 오늘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라고 질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답하시기를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진다”(11,5)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이사야 예언서에 있는 말이고,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요약하기 위해 인용하던 구절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그런 자료들을 가지고 오늘의 이야기를 구성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을 ‘라자로’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도 요한 복음서가 의도적으로 한 일입니다. 루카 복음서에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예화(16,19-31)가 있습니다. 그 예화에서 부자와 라자로 두 사람이 죽어서,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안으로 갔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어 이 사실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자기와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청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 복음서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을 라자로라고 불러서 죽었던 라자로가 과연 살아 돌아왔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실제로 당신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유대인들이 그분을 죽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시작하면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 그동안 세상에서 사랑해 온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3,1)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끝마쳤습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어졌다”(19,30)는 말씀이었다고 말합니다. 끝까지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같은 실천을 자기도 하겠다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 실천들이 있는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마르타가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실천 안에 주님, 곧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요한 복음서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듯이,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우리도 한다면, 우리 안에도 예수님이 사셨던 그 생명이 살아 있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도 죽음을 넘어 하느님 안에 부활하여 살아 있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반영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삽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것으로 자기 생명을 보장하려 합니다. 재물과 권력을 얻어서 우리의 생명과 삶의 질을 보장하려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보장해 주시는 생명을 찾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에서 그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비통해 하면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실천이 비록 자기 목숨을 대가로 요구할지라도 그것을 실천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사랑에서 우리 생명의 의미와 삶의 질을 보고 배우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사랑이 하느님으로부터 흐르는 생명 현상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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