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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파와 간음한 여인, 누구의 죄가 가벼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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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바라기 작성일13-03-30 14:09 조회1,9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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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새파와 간음한 여인, 누구의 죄가 가벼울까?
 
 
지난 3월 8일은 105번째를 맞는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3월 12일 한 일간지 칼럼에서는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는 여성의 날 슬로건을 언급하며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26개 오이시디(OECD) 회원국들의 ‘유리천장 지수’를 공개했다. 여성들이 일자리와 관련해 얼마나 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나라별로 비교한 이 지수에서 1위는 뉴질랜드, 한국은 꼴찌였다. 칼럼니스트는 물었다. “어린이 행복지수 꼴찌, 최장 노동시간, 최저 출산율, 최고 성범죄율. 왜 한국은 부정적인 항목은 도맡아서 일등을 하는 것일까?”
 
성당에서 미사 시간에 앉아 계신 분들을 보면 꽤 많은ㄼ 분이 어르신들이다. 그것도 할머니들이다. 이는 필자가 사목하는 본당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비교적 ‘젊은 어르신들’은 정말 어렵게 시간을 냈다.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성당에 자주 올 수 없어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그런 분들은 아마 오시지 못했을 것이다. 그 ‘직장생활’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자식들의 손자 손녀를 돌보는 경우에는 그나마 할 말이 있다. “그래 봐야 그눔들 크면 저 혼자 큰 줄 알 텐데... 무엇하러 그 고생을 해!” “그래도 어쩌겠어, 딸이 봐달라는데...” 이 대화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있다. 아들이든 딸이든 ‘돈벌이를 하고 있어’하고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남의 집에 가서 집안일도 하고 그 집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은 차마 말하기 어렵다. “자식이 있지만 내가 보태야 할 형편이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이 있지만 내가 일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야지” 하는 분들의 처지도 속을 들여다보면 매한가지다.
며칠 전 본당의 ‘시니어 아카데미’가 겨울 방학(?)을 끝내고 새 학기를 맞이했다. 새로 입학한 분들을 환영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여덟 분 가운데 한 분이 할아버지였다. 미사 알림 시간에 “남학생을 특히 환영합니다!”라고 강조했음에도 남학생은 참 드물다. 깨끗하게 차려입고 모처럼 나들이한 복장의 남학생이셨다. 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에는 젊어 보이신 분이다. 나부터도 ‘참 용감한 분이시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많은 할아버지 남학생들은 어디로 가셨을까? 서울의 중심가인 명동에 가는 길에 가끔 탑골 공원 근처를 들른다. 할아버지들이 참 많다. 그때마다 궁금하다. 할머니들은 모두 어디에 가셨을까? 간혹 보이는 분들은 할머니라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박홍기
 
명동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은 더욱 혼란스럽다. 일본 중국 동남아 관광객이 너무 많아 필자가 이방인처럼 느끼기까지 한다. 혼란스러움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다. 어차피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을 테니까... 혼란스러움은 그 많은 매장 앞에 서 있는 화려한 복장과 현란한 몸짓의 도우미 때문이다. 가게마다 손님을 맞이하는 입구에는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 있다. 멀찍이서 보면 잘 모르지만 가까이 지나가면 마음이 짠하다. 그녀들의 복장은 참 슬프다. 그녀들의 복장은 추위와도 더위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녀들의 목소리도 매우 아프다. 높은 톤으로 마이크에 대고 손님을 끌지만 맑은 목소리를 듣기가 힘들다. 얼마나 많이, 그리고 크게 외쳤으면... 일본어와 중국어를 외치고 있는 그녀들의 노동(?)에 부끄럽고 숙연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더 혼란스럽다. 상품의 일부가 되어 버린 여성을 대부분의 여성이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땅의 여성은 누구일까? 세상에서 몇 안 되는 여성대통령을 선택한 이 땅의 여성은 어떤 존재일까? 이 땅에 양도할 수 없고 절대적인 존엄함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의 여성은 과연 존재할까? 일부 여성은 귀한 존재겠지만, 꽤 많은 여성은 소비재로 전락하고 있다. 가끔 언론에서 정말 어렵다는 고시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반을 넘었고, 사관학교에도 여성생도가 1등으로 졸업했다는 기사를 보며 어쩌면 우리는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성은 이제 한 인간으로서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하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여성은 결코 존엄한 한 인격체가 아니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여성을 대하는 자세가 근대 이전, 중세, 아니 고대 사회의 수준, 곧 여성을 물건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필자는 그 모습에서 우리 사회에 태연한 폭력을 본다. 복음서(요한 8,1-11)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다그치는 장면이 나온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물론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헤아리며 경건하게 삶을 꾸려간 이들의 대명사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따라 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겠다고 들이댄 그들은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까? 백성을 가르치고 지도하고 보호해야 할 지도자들로서 백성을 식민지배의 고통으로 내몬 그들의 무능과 무책임과 탐욕이 그 여인의 죄의 무게보다 가벼울까?
 
대통령 선거 전에 폭력 추방이 맹위를 떨친 적이 있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골목을 순찰하는 경찰차마다 붙여져 있어서 외울 지경이다. 조직폭력, 성폭력, 학교폭력, 갈취폭력, 주취폭력, 그것이 뿌리 뽑아야 할 5대 폭력이었다. 최근에 다시 4대 폭력으로 줄어 등장했지만, 그 폭력의 관련자들은 대강 무능한(?)이들이었다. 그러면 이 땅의 유능한 인재, 나라를 위해 일할 그 인재들의 부동산투기, 위장전입, 탈세, 병역면제와 기피, 논문표절 같이 열거하기도 힘든 그 능력들은 한 여인의 일탈에 돌을 던져 죽여도 괜찮을 정도로 고결한 것일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힘없는 한 여인 사이의 그 험악한 대치가 오늘 우리 사회의 자화상처럼 떠오른다. 큰 폭력은 너무 커서 볼 수도 없고 그러니 볼 필요 없고 나아가 능력으로 칭송을 받으니, 그대들은 작은 폭력을 조심하라고 다그치는 모습 말이다.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 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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