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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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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바라기 작성일13-07-01 09:53 조회2,0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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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외면하는 종교는 ‘마음’도 외면한다
[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0
 
 
 
그리고 그분은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온갖 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쳐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지자 갖가지 병과 고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곧 귀신들린 사람들과 몽유병자들과 중풍병자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그분은 그들을 고쳐주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와 데카폴리스와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분이 앉으시자 그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태 4,23-5,1)
 
예수의 가르침, 선포, 치유에 대한 종합적인 오늘의 보도는 마태오 복음서 9,35에 거의 글자 그대로 다시 나타난다. 마태오에게 예수의 가르침은 회당, 율법, 윤리적 훈계와 관계되고, 예수의 선포는 복음, 하느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활동의 전기적 · 역사적 순서에 따라 마태오가 보도하는 것은 아니다. 마태오 복음 5장에서 7장까지 가르치는 예수를, 8장과 9장에서 행동하는 예수를 전하기 위한 전체적인 그림을 마태오는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은―인간의 몸과 마음처럼―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행동 없는 가르침은 공허하고, 가르침 없는 행동은 맹목적이다.
 
   
▲ ‘산상 설교’,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의 작품, 1862년
예수를 따르는 군중들은 제자들과 함께 산상수훈의 주요한 두 청취자로 나타난다. 공동성서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백성’ 사상에 연결되어 있다. 23절은 신명기 7,15와, 5,1은 탈출기 19,3과 닿아 있다. 예수는 우선 갈릴래아 지역을 돌아다닌다. ‘방랑’은 유다교 예언자나 어떤 유다교 신학자(랍비)에게서도 볼 수 없는 예수의 독특한 생활방식이다. “그들의 회당”이란 표현에서(마태 7,29; 10,17; 23,34) 마태오 공동체와 유다교의 서먹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 추종자들이 이미 유다교 회당에서 추방되었다고 여기서 추론할 수는 없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스승으로서 회당에서 가르친다고 언급된다.
 
4복음서에서 유일하게 여기서 “시리아”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시리아는 마태오가 소속된 공동체가 있던 곳으로 짐작된다. 예수는 선교하기 위해 시리아 땅을 밟진 않았다. 갈릴래아 북쪽 국경지역에 접한 시리아는 이스라엘 땅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예수 활동의 소문이 국경을 넘어 시리아로 퍼진 듯 하고, 그곳 병자들이 국경을 넘어 남쪽 갈릴래아로 온 것 같다.
 
귀신들린 사람들(마태 8,16.28; 9,32), 중풍병자(마태 8,6; 9,2) 그리고 마태오 복음에 특이하게 언급된 몽유병자(마태 17,15)가 나타난다. 병과 고통에 대한 자세한 언급에서 예수 활동의 작은 부분이라도 빠트리지 않으려는 마태오의 세심함이 느껴진다. 가르침 뒤에 치유가 뒤따르는 점도 주목된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치유하시듯,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을 치료한다. 〔“야훼께서 모든 병을 물리쳐 주실 것이다. 너희가 일찍이 이집트에서 앓던 온갖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해 주시고…….” (신명 7,15)〕
 
다섯 군데 나타나는 지명을 자세히 보자면, 북쪽에 갈릴래아, 남쪽에 유다, 동쪽에 데카폴리스(=열 개 도시)와 요르단강 건너편이 나오고 예루살렘은 중앙에 위치한다. 이방인의 땅으로 여겨지던 사마리아는 언급되지 않는다. 유다, 갈릴래아, 요르단 강 건너편은 예루살렘 대사제의 종교적 영향권에 속했다.
 
마태오 복음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데카폴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데카폴리스는 독립된 행정단위로서 거주자 대부분이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데카폴리스 지역은 신명기의 기록으로 보면 이스라엘 땅에 속했다. 마르코 복음 3,8에 나타나는 띠로, 시돈뿐 아니라 에돔이 마태오에서 빠진 것이 특이하다. 남쪽에 위치한 에돔은 당시 유다 지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명기 2,5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이르(=에돔, 이두메아) 땅을 차지하면 안 된다. 마태오는 당시 행정구역보다 신명기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를 신학적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산상수훈을 위한 배경이 오늘 본문에서 만들어졌다. “산”은 마태오에서 기도 장소(14,23), 거룩한 곳(15,29), 가르치는 장소(24,3)이며, 예수가 거룩하게 변하는 계시의 장소이다(17,1; 28,16). 오늘 본문에서 시나이 산으로 올라가는 모세처럼(탈출 19,3; 24,15) 예수도 산으로 올라가고 내려온다(마태 8,1). 모세가 율법이 적힌 판을 산에서 가지고 오듯 예수는 산상수훈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앉는’ 것은 유다교에서 스승이 가르치는 자세로 여겨진다. 산 위에 앉은 예수는 가르치는 품위를 지닌 것이다.
 
군중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단어로 마태오는 오늘 본문 4,23에는 라오스(laos), 4,25와 5,1에 오클로이(okloi)를 쓴다. 예수는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laos)을 위해 치유행위를 한다. 그러나 예수를 따라다니는 군중을 오클로이(okloi)로 나타낸다. 개신교 성서학자 루즈(Ulrich Luz)는 자신의 마태오 복음 주석서에서 오클로스(oklos)라는 단어는 라오스보다 중립적이며 라오스를 미래의 잠재적 교회로 나타내기에 적합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와 군중을 연결하는 중재 역할로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군중과 제자들을 완전히 독립된 집단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군중이 제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군중을 위해 존재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군중에 대한 지배권을 준 적 없다.
 
성서에서 나오는 예수의 제자를 종교인(성직자, 목회자)으로, 군중을 신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의 제자는 1등급 제자, 군중은 2등급 제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종교인은 1등급 그리스도인, 신자는 2등급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럴 필요 전혀 없다. 그런 신학적 착각이 종교인과 신자 모두를 서서히 망가뜨린다. 자기 자신에게 속는 사람에게 치료약은 없다.
 
예수가 병자를 치유한 것은 무슨 뜻일까. 종교는 인간의 정신세계만 다루는 분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종교는 정치에 관심 갖지 말고 오직 마음의 문제에 몰입하라고 훈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절반, 즉 마음에만 주목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몸에 주는 영향을 과대평가하고, 몸이 마음에 주는 영향을 축소하기 쉬운 동네가 바로 종교다. 마음 문제에 대한 글로 인기 얻는 스님도 계시지만, 종교를 심리학으로 축소하는 그런 경향과 그리스도교는 아무 관계없다.
 
몸을 외면하는 종교는 이미 마음도 외면해버린 셈이다. 그리스도교를 마음 공부로 축소할 수는 없다.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삶에 관계되는 모든 분야에 그리스도교는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정치, 경제, 사회악, 부패, 가난, 노동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몸이 마음에 주는 영향을 그리스도교는 지금보다 더 주목해야 한다. 몸이 마음에 주는 영향을 예수는 무시하지 않았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소브리노(Sobrino)로부터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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